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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이름 : Ernesto Che Guevara /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ㆍ출생 : 1928.6.14 / 아르헨티나

ㆍ사망 : 1967.10.9 /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태생의 공산주의자. 흔히 체 게바라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본명이 아닌 애칭으로, 훗날 그를 상징하는 본명이 되었다. 체(Che)의 원래 뜻은 바로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 무슨 일이야?)"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 산맥 지방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c'è'를 '체(Che)'로 바꿔 쓰고 발음하였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의 동생이 낸 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체를 상습적으로 써서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가까운 동지들은 체 말고도 엘찬초(El Chancho)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하니 별명이 많은 사나이었던 셈이다. 체게바라가 쿠바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 출신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는 사실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유년시절의 체 게바라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산타 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공화국 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 클수록 가정에 헌신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고 한다.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1862~1911)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사색과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창시절 럭비를 즐겨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



의사에서 혁명가로

원래 의사를 꿈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했으나(알레르기 연구로 의사면허를 취득), 우연히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피폐한 남미의 현실(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수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광부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또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체는 이 당시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에 종사하게 된다.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2011년 88살에 세상을 떠난 그라나도는 이 영화를 매우 호평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대한 비판적 평가중에는 극적 재미를 위해 온건한 급진주의자로써 젊은 시절 체와 의견을 나누던 친구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바보스럽고 경박한 인물로 묘사해 버렸다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면 꽤 너그러운 인물인 듯 하다. 참고로 그라나도는 체와는 달리 혁명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의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체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나갔으며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체의 초청으로 쿠바로 와서 의과대학을 창립하고 생화학 교수로 일하며 쿠바에서 생활했다.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해,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총을 들어 사살했다고 한다)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의 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전사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12명이 남았다는 설도 있다)으로 줄어들었다.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오래전부터 지쳐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가 성장하였다, 그들은 결국 2년 뒤인 59년 1월에 수도 아바나(Havana)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내었다.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이었다.


대장 피델 카스트로

부장 라울 카스트로[9]

부장 에르네스토 게바라

대원 우니베르소 산체스

대원 후안 알메이다

대원 시로 레돈도

대원 라미로 발데스

대원 알만도 로드리게스

대원 레네 로드리게스

대원 프란스스코 곤잘레스

대원 라휄 챠오 산타나

대원 에피게뇨 아메이헤이라스

대원 카리스트 모잘레스

대원 까밀로 시엔후에고스

대원 레이날도 베니테스

대원 성명불명

대원 성명불명


이후 추가로 생존해서 합류한 6명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대원 호세 모얀

대원 루이스 크레스포

대원 훌리오 디아즈

대원 카리스트 가르시아

대원 카를로스 베르무데스

대원 성명불명



혁명은 성공, 경제정책은 실패

혁명 직후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실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에 맞먹는 영향력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는 그린마 호에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간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게릴라들 중 유일한 의사이자 군의관이였고, 후일 대민 의료지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영향력과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이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공업국화 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


하지만 산업화와 금융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빴다. 체는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고, 이상가였지 실무자가 아니었다. 은행총재이었지만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실무를 보기 위해서 책상에 앉거나, 직접 실무를 보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통해 항상 구멍난 양말을 신고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근로활동을 더 많이 했다. 연출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사진 촬영을 좀 많이 했고, 언론 등을 통해 노동하는 사진들이 많이 퍼졌다.


게다가 너무 서투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과적으로 쿠바의 경제성장률이 침체되면서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로 쿠바는 1970년대부터 80년대 전반기까지 동구권에 많은 의존을 하면서 쿠바도 어느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동유럽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동유럽 공산정권과 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이 피델 정부의 붕괴를 목적으로 동구권 국가들에게 쿠바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중용하면서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1990년부터 199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쿠바는 공장 가동이 어려워지고 식량수급도 줄어들어서 하루 2끼정도나 겨우 먹게 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의 경제재제로 공산정권이 붕괴될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와중에도 여러가지 영리한 방안을 통해 어찌어찌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높게 평가할 만 하나 그 여파가 현재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쿠바가 가난하다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노조가 기업 경영에 동참하게 하고, 물질적 인센티브가 아닌 도덕적 모티베이션을 통해 노동실적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다. 장 코르미에의 평전에 의하면 체는 물질적 욕망을 노동의 이유로 삼는 행위는 우리가 깨부순 자본주의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다 했다. 즉 일을 해서 많은 돈을 버는 행위 자체를 악으로 봤다는 얘기.


그래도 그 수준에 맞게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와 아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쿠바가 미국과 단교된 상황에서 의학만큼은 상당히 발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체 게바라의 공로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쿠바를 떠나다

카스트로는 결국 친소련정책을 취하여 자국 내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되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등지게 된다. 


체 게바라와 소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체 게바라는 마오쩌둥의 혁명전략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제정 러시아가 농업 국가라 해도 그 안에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전술을 적용하기엔 매우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활동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공장 노동자들은 그 수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극단적인 빈곤층과 빈농의 수가 너무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위치가 절대적으로는 빈곤층이나 상대적으로는 중류층~중하류층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쿠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는 마오쩌둥식 혁명 모델이 적합했다.


2. 소련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계획에서 쿠바는 당연히 농산물 생산 - 특히 사탕수수 보급 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탕수수 생산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결국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고, 단일작물 경작에 의존하는 경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쿠바 혁명정부의 지도부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화(공업화)를 달성해야만 했다.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던 소련은 쿠바 혁명정부가 만족할만한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고, 지원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빠른 산업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던 쿠바에게 사탕수수 생산에 의존하는 경제의 유지를 강요하다시피 제안하는 소련은 새로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나중에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내전이 한창인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와 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콩고 반란군은 술집, 매춘굴에 드나들면서 성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다와(Dawa)라는 미신을 믿어서 마법의 약을 마시면 총알을 맞아도 괜찮다고 여겼다. 무기에 대해 부주의해서 권총으로 장난치다가 자기 허벅지를 날려먹기도 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변장을 하고 콩고에 들어갔던 체가 콩고의 국회의원 고드프루아 샤말레조에게 정체를 밝히자 국회의원은 '이 사실이 절대 알려져서는 안됩니다. 절대로요! 국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겁니다.'며 당황해했다. 그나마 체가 믿고 존경하던 콩고의 지도자, 로랑 마투디디가 체의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바람이 심한 날 탕가니카 호를 건너다가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마투디디의 부하 둘이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자 그들은 마법의 힘이 그들을 막고 있다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마투디디를 내버려두고 육지로 달아났다.


마투디디의 부하들은 외국인이라면서 체의 명령을 듣지 않으려 했고 자신들이 트럭이 아니라면서 무거운 군장을 메려하지 않았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어찌어찌 쿠바군 40명이 콩고인과 르완다 투치족 160명과 함께 6월 29일 반데라 요새를 공격했지만 반군들은 대부분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쿠바군 하나가 전투 중 일기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쿠바가 콩고 반군을 지원한다는 것을 CIA가 알게 되었다. 체는 '이런 병력으로 승리란 불가능하다'며 좌절했지만 계속 쿠바 게릴라 부대를 모았고 콩고 반군에게 '너희들 같은 남자와 싸우느니 여자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다그치며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10월, 정부군과 용병대장 마이크 호어의 연합군이 포함, 폭격기, 헬리콥터 등을 동원해 포위 공격하자 쿠바군과 반군들은 탕가니카 호로 패주했다. 


11월 20일 체는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일부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배를 타고 퇴각했다. 탄자니아로 도망친 체는 최측근 전우 셋에게 이렇게 물었다. "계속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측근들은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며 물었고 체는 "어디든지"라 답했다. 측근들과 부하들 모두 거부하고 소련 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로 거쳐 쿠바로 돌아가고 체만 혼자 주 탄자니아 쿠바 대사관에 숨어 지냈다. 11월 25일 콩고군 참모총장이었던 모부투 세세 세코가 쿠데타로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을 몰아내고 철권통치 시대를 열며 콩고 혁명은 끝이 났다.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그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 1966년 11월 변장한 채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된다.



볼리비아에서의 죽음

체 게바라는 머리카락을 뿌리째 뽑으면서 대머리 사업가로 변장했다. 마지막으로 체의 아내 알레이다가 자식들을 데려오자 '아버지의 친구 라몬 삼촌'이라고 속였으며 카스트로는 '완벽 그 자체였다. 아무도 그를 몰라봤다. 절친한 동지들조차 그에게 말을 걸면서 손님 대하듯 했다.'고 회고했다. 체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날, 카스트로와 체는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포옹하고 서로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고 한다.


포코 이론에 나온 대로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볼리비아 농촌에서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내놓은 식구 취급했고 여기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1966년의 마지막 날, 볼리비아의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는 자신이 볼리비아 투쟁을 지휘하겠노라 우겼고 체도 지휘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싸웠다. 이튿날 몬헤는 볼리비아인 게릴라에게 남고 싶으면 남되 당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남은 볼리비아인은 12명이었다. 몬헤는 공산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 문제가 곧 터질 것 같다. 그럴 경우, 우리가 나서서 막든가, 매장당하든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그의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하겠다고 싸운 남미 독립 혁명가, 지도자들(시몬 볼리바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마누엘 데 벨그라노 등)부터가 자신들이 백인 문명인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탄압해왔던 역사가 있었으니 이에 시달렸던 원주민들은 역시 백인인 체 게바라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거기에다 헬리콥터를 이용한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 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와 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게릴라를 벌이며 도망다녔으나 끝내 확실한 거점을 만들지 못해 점점 한계에 몰렸다.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정부군 특무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게바라는 고국 쿠바와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칠 거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에는 이유가 있던 것. 일단 게바라는 게릴라전이긴 했지만 군복을 입은 전쟁 포로이므로 교전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고 전범으로 기소하더라도 범죄자를 정식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하는 것은 법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게바라가 생포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소총과 권총 한 자루, 단도, 시계와 담배 파이프 두 개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가방에서는 1만 5천 달러가 발견됐다. 당시 그는 이발과 면도를 오래동안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 신발인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


게바라는 근처에 있는 라 이게라 마을의 한 학교에 감금됐고, 다음 날인 9일에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하여 체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단하였다. 그래서 체는 비밀리에 볼리비아 병사들에게 처형된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해 병사들을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집행자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포코 이론의 실패와 몰락을 모조리 보여준 게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활동이었다.



죽음 이후

사후,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 그의 데드마스크는 정확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이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손을 보냈는데, 이는 그를 식별할 증거는 그의 지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체는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에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했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한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겨났다. 2013년에 볼리비아 정부의 협조아래 체의 행적을 담은 일대기가 담긴 일기와 편지, 신문기사, 사진, 문서 등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평가

간단히 말해서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인물이라는 평으로 압축할 수 있다. 묘하게도 이는 게바라가 롤모델로 삼은 마오쩌둥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평가다.



상품화된 혁명가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결국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 씩이나 영화화되었으며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아직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동료들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잘생기고 스토리가 있어서기도 하고, 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쿠바에서 재산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망명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카스트로 뒷담화나 까면서 회고록 팔아먹으면서 편히 살거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실은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으니.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의 스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술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이콘으로서 써먹은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이다.



긍정적 평가

천식과 같은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과 고강도 노동, 게릴라전까지 감내하는 극기력은 체 게바라의 삶에 바탕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안락한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승리한 혁명사회의 각료로써 누리는 삶 대신 혁명가의 삶을 살게 하였다. 혁명가로서 종속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체의 이상은 라틴아메리카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와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상술되었듯이 잘 팔렸고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독재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나.


근래에 남미에서는 체 게바라가 신성시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이런 현상이 강하며 남미 신문들은 아예 대놓고 게바라의 사진에 "성 체 게바라"라는 설명을 달아놓기까지 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면 수백 년 뒤에 게바라가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하는데 과연?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의 측근들은 게바라가 성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게바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 하자 거절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자가 종교를 믿을 리가 있나. 사실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인 시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물며 가톨릭 교회와 별 관련도 없었던 게바라가 성인으로 시성될 지는... 아무래도 성인에 오르는 일은 여러 모로 없을 듯 싶다. 다만 알포다에 따르면 체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니 종교적 추앙은 지속 가능성이 있다. 



비판

체 게바라는 지나친 이상론자였으며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있다. 

카스트로 평전을 썼던 로버트 E 쿼크는 게바라가 의사면허를 턱걸이로 취득하였고, 의사로서 고정적인 수입을 받고 안정적으로 생활할만한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외래진료활동을 많이 다닌 것이며, 애초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험이나 유흥을 즐기고, 그러한 행동의 연장으로 혁명에 가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쿠바혁명 과정을 살펴봐도, 카스트로나 체의 계획 능력은 매우 떨어졌고, 우연찮게 프랑스 언론을 통하여 해외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크게 덕을 봐, 결국 본인들의 능력보다 서구언론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공하였으므로 유능하기 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설사 진작부터 피델 카스트로가 언론 플레이를 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는 것에 적극 노력하였다지만, 이건 전적으로 카스트로의 역량이 좋아서지 체는 그저 거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혁명에 성공하여 쿠바 중앙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무리한 국유화와 국고의 낭비로 쿠바 페소는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산업부 장관 시절 인프라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공업화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그는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으며, 또한 쿠바와 볼리비아, 콩고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카스트로의 지시로 쿠바의 라 카바나에서 정치범 수용소를 건립했는데 체는 그곳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어 많은 '반혁명분자들'이 처형되었고, 게바라 자신도 사형집행조에 참여되어 직접 사살을 집행했다. 개중에서는 체가 소녀와 임산부를 권총으로 사살하기까지 했다는 주장도 있다. 라 카바나의 노동 수용소 성격이 공직자 교화 용도였다면 애초에 소녀와 임산부가 살해될 까닭이 없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친선대사의 자리를 받아 국외로 가기전까지, 3개월 간 형무소에서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래서 라 카바냐 형무소는 지금도 쿠바에서 제일 유명한 형무소로 공포의 상징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형무소에서의 처형이 정식 재판을 통해 진행된 게 아니라 인민재판을 통하여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인민재판이라는 것은 법적인 절차나 법리에 따르지 않고 재판에 참여한 좌중들이 죽이라고 하면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수감인 중에서는 중죄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수감된 자나, 아주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좌중들의 군중심리에 이끌려 죄가 없음에도 사형수로 몰려 처형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특히 정치범 처형의 경우 체의 경력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 이들 정치범들이 주로 카스트로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피델은 혁명 초기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군중심리 요소에 대해서는 변명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재판은 미국 우익들의 선전과 같이 마구잡이식 학살이 아니라 체계적인 기소에 따라 바티스타 정권에 기생하던 흉악 정치범들을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단순히 견해가 다른 정치범을 처형한 것이 아닌 바티스타 집권 기간 중 횡포를 일삼거나 백색테러를 저지른 혐의가 확인된 이들을 처형시킨 것이라는데 아직 교차 검증이 되지 않았고 피델 카스트로 본인이 정치선전과 포장에 능한 인물이므로 참작이 필요하다.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체 게바라를 생포한 볼리비아의 가리 쁘라도 장군은 그의 실패 원인을 크게 3가지로 꼽았다.


첫째로, 볼리비아에 반정부 활동을 하러 온 것이다. 애초에 그가 게릴라전으로 큰 성과를 거뒀던 쿠바의 경우 바티스타가 독재를 일삼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발이 컸기 때문에 반정부활동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경우 새롭게 들어선 군사독재정부가 도시 노동자층의 파업과 시위를 강제로 진압하고 민주화 세력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지만,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민주 정부의 혼란스럽고 성과없는 개혁에 지친 상당 수 농민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킬 세력으로 보였기에 농촌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둘째로, 보급이나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력만 분산하여 정부군에게 격파당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결과 정부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흩어진 다른 게릴라 부대를 공격할 때에는 서로 연락이 닿질 않아 도와주지 못하다 궤멸되었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않았다. 교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면 민가에 숨어들거나, 국외로 탈출하거나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도 교전만 하던 끝에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게바라가 대체 왜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했는가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 볼리비아란 여행하다가 거쳐간 곳에 불과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정부군보다 현지를 더 잘 알아야만 정부군보다 열등한 장비와 보급 속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볼리비아는 1950년대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의 토지 문제를 해결하였고, 1964년에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서 반발이 거세기는 했지만 새로이 들어서 군사독재정권도 토지 개혁만은 뒤엎지 않아서 농촌 지역에서의 민심 이반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 활동을 두고 '자살 여행'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볼리비아행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의 논리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만들어 남아메리카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는 말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성공을 해야 각국을 혁명을 수출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험난한 안데스 산맥의 지형 때문에 숨어서 게릴라를 벌이기 쉬워서 볼리비아를 골랐다 하여도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게, 지형 때문이라면 파라과이를 제외한 중남미 모든 나라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체 게바라의 원래 조국 아르헨티나 역시 서쪽 칠레와의 국경지대는 해발고도가 상당히 높고 무주지도 상당히 많아 게릴라전을 벌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좌익의 입장에서도 게바라의 노선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받고 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서두른 무장봉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혁명 조직도 깡그리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리리싼이 벌인 모험주의적 봉기와 비슷한 사례로 비판받는다.




대중 작품 등의 모습

이미 그가 처형당한지 몇년 안된 1969년 오마 샤리프가 주연한 전기영화가 만들어졌다. 


뮤지컬 에비타에서 나오는 건 유명하다. 다만 본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체'라는 인물로, 한국 연출을 제외하고는 직접 게바라로 그려지지 않으니 유의할 것. 체 게바라가 형의 친구인 알베르토와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던 시절은 아래에 적힌 Che 2부작에서 다루어지지 않았고 2004년의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다루어졌다.


그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예고편. 스티븐 소더버그 연출, 주연은 베니치오 델 토로로, 그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체 게바라의 일생을 담은 영화이기에(정확히는1부 아르헨티나는 혁명 전/후 몇 년 동안, 2부 게릴라는 볼리비아 입국부터 사망 시점까지) 러닝타임이 4시간이 넘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국내 개봉이 안 되고 있다. 옆나라 일본에선 1, 2부가 DVD까지 나온 판인데... 이념 논란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체 게바라 평전도 나온 마당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 실제 원인은 살 사람만 사는 한국 시장의 시궁창스런 환경이 제일 큰 문제. 최근에서야 DVD가 국내에도 출시되었고, 2019년 6월에 <체 게바라>라는 제목으로 1, 2부 모두 국내 개봉하였다. 체 게바라: 1부 아르헨티나, 체 게바라: 2부 게릴라 참조.


특이하게도 상술한 두 체 게바라 전기 영화 모두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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